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제목만 보고 '아침에 먹는 사과는 약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었다. 부제와 책 소개 글을 찬찬히 살펴보니 아니었다. 요즘은 제목만 보고 어떤 책인지 으레 짐작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느새 사소한 것도 미리 보기를 해야 덜 불안하다. 실패 확률은 줄었지만 불안도는 증가했다.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미리 알아내서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 주문한 물건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궁금하지 않은 것까지 상품평을 보며 확인하느라 시간을 쓴다. 미리 당겨 알수록 미래는 더 선명해지는 것 같기 때문에.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저자 디아는 과거에 북 에디터로 일했으며, 지금은 책을 만들고 요가를 가르친다. 즉 요가하는 에디터인 셈이다. 스물아홉에 한 번, 서른아홉에 한 번. 그렇게 두 번의 갭이어를 거치며 느낀 생각을 책으로 담고 있다. '아.. 그러면. 요가와 명상.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겠구나' 다시 한번 으레 짐작한다. 책은 서울을 오가며 주로 지하철에서 읽었다. 전자책으로는 이번 달 18일에 리디북스에 출간되었다. 내 생일이랑 같네. 전두환 생일도 같고. 강동원 생일도 같고.
책을 읽기 전에는 미리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면, 책을 읽을 때는 작가와 나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부터 찾는다. 우리는 스물아홉에 퇴사했다. 그 후 나는 불과 1년이 지났지만, 작가는 10년이 지나고 서른아홉에 한 번 더 퇴사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왔다. (나도 서른아홉이 되면 한 번 더 퇴사할까)
작년 8월에 씨네21 이다혜 기자에게 '리뷰의 정석' 강의를 4주 동안 들었다. 첫 주에 수강생들에게 문진표를 하나씩 나눠줬는데, 거기에는 8가지 질문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책의 목차는 어떻게 구성될까요? 10개의 챕터로 나눠주세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다가 시간 순으로 나눠볼까 생각했지만 그 방식은 재미없었다. 그래서 살았던 지역을 챕터로 나눠봤다. 지금까지 3개의 챕터가 나왔고 나머지 챕터는 앞으로 살고 싶은 지역과 이것저것으로 채웠다.
갭 이어(gap year)는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전에 '쉬어가는 페이지'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이 책에서 비슷한 문장이 보여서 그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지금 3번째 챕터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렇다. 난 4번째 챕터를 채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준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느 정도 집중해서 ‘몰입’을 체험하는가 하는 기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을 평가한다면, 지금껏 연봉의 액수나 직업상의 특권 혹은 자동차 크기에 맞추었던 우리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진다. — 울리히 슈나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몰입. 참 좋아하는 단어다. 책 읽을 때, 글 쓸 때 수도 없이 느껴봤다. 나를 잃는 기분이 들었던 일에서 벗어나 카페에서 글을 쓰고, 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는 순간이 좋았다. 좋은 순간들이 쌓이니 가치관이 조금씩 달라진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넉넉히 쓰고 읽는 삶을 지향하고 있더라. 그때 생각했다. 이쯤이면 퇴사해도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홀로서기를 했고, 나를 크게 흔들었던 불안을 아직까지는 잘 견뎌내고 있다. 작고 큰 파도 같은 불안을 언제나 내 삶에 일렁이지만 제자리에서 그냥 맞고만 있을 건지, 파도 위에 올라탈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에 달려 있었다. 3번째 챕터에 내 이야기가 빠졌다면 4번째 챕터에는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1년이라면, 아니 1년이라 하더라도, 번듯한 결과는 나지 않는다. 기대를 접어야 한다. 큰 테마에 헌신하는 일은 자격증 따기나 결혼, 창업, 입학 같은 결과물을 내는 일과는 성격이 다르다. 재밌게 하다 보니 결과가 날 수는 있어도 결과물을 목표로 하면 실패한다. 아니 성공하더라도 테마를 실현해내지는 못한다. 테마를 향한 불씨는 ‘그래도 이건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불안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꺼지고 만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회사 생활 1년 한다고 없던 실력이 갑자기 확 늘지 않는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1년이라고 번듯한 결과가 날까. 오히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결과에 집착했는지 모른다. 틀리면 좀 어때. 선택이라는 건 애초에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건데. 매일마다 찾아오는 점심 메뉴가 성공적이면 애초에 '성공'은 당연한 거고 실패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실패한 적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만 도전하고 있는지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맛집에 가면 사람은 붐빌 수밖에 없다.
오래 일한 사람은 매사에 흥미가 없다. 다 아는 이야기만 같기 때문이다. 그는 ‘무감각화 메커니즘’에 빠져 있다. 익숙한 일터나 공간에서 우리는 거의 절반쯤 눈을 감은 상태로 지낸다. 처음엔 그래야 마음이 덜 피로하다는 이유로. 그러면 시간은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흐른다. 출근해서 메일 한두 개 보냈는데 ‘벌써 점심이야?’ 하는 식이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흥미가 없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 호기심이 없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어차피 다 해봤고, 다 거기서 거기다'로 귀결된다. 일상은 조금만 비틀어도 흥미를 유발할 요소가 많은데, 거기서 거기라니. 글쓰기는 혼자 해도 재밌지만, 같이 해도 재밌다. 혼자 쓰면 나는 작가일 뿐이고, 읽는 사람은 독자일 뿐이겠지만, 같이 하면 우리 모두가 작가이자 독자가 된다.
대화를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당연하다는 듯 주의는 끊임없이 달아난다. 한 가지를 지긋하게 못 보고 계속 다른 것을 스킵, 스킵한다. 잘 듣고 곱씹어 생각하는 일은 어쩐지 지루하다. 진득하게 한 주제를 이어가는 대화는 이내 재미없다. ‘무언가’가 끼어들어 연결은 툭툭 끊긴다. 해서 조금 전에 한 말과 맥락을 자꾸 잊어버린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은 깊게 주의를 둘 만한 가치가 없다는 듯이, 주제와 주제 사이를 점프한다. 그래서 진짜 대화를 하지 못한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집에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면 매번 빨리 감기만 한다. 다음 장면이 궁금하기도 하고, 2시간 내내 영화만 보고 있기도 지루해서 그렇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아 그렇구나. 나는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효율만 따진 채, 시간을 온전히 쏟아야 하는 가치는 평가절하했다.
일에 관해서라면 20대에는 일이 너무 많다, 일하는 환경은 언제 좋아지나,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정도의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자부심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일은 일이 아닌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만이 좋은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점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취미가 일이 되는 건 소수 덕후들에게만 해당된다. 세상에는 해야만 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작가의 생각과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첫 번째 업으로 할 필요는 없다. 취미가 일이 되면 좋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취미가 일이 되지 못하더라도 퇴근 후, 그리고 주말 시간을 이용해서 즐기면 된다. 그러라고 주 5일제, 주 52시간제 근무가 도입된 거 아닌가, 일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CEO를 하고 있어야지. 직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어찌나 공감되는 문장이 많던지. 너무 많아서 이번 글에 소개를 못할 정도다.
기억 전문가는 인간의 기억 체계를 도시에 비유한다. 기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도시가 반응하는 양상과 닮았다’(이반 이스쿠 이에르도, 《망각의 기술》). 낡은 건물은 파괴되거나 보수되고, 새 건물은 속속 들어선다. 그런데 거리나 랜드마크, 저수지 같은 자연물은 세기가 지나도 그대로다. 도시의 풍경처럼 인간의 기억 체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도시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곳을 기준으로 알아차리는 것처럼, 아무리 늙고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즉, 기억은 바뀌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기억 전문가는 소중한 것을 이렇게 기억하면 좋다고 조언한다. 언제나 있을 것 같은 길이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기억하라고. 그리고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라고. 소중한 것을 기억하려면 변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또 내 몸을 그쪽으로 데려다 놓아야 한다. 지었다 허물어지는 두꺼비집 같은 도시의 어느 골목길에서 생각한다. 새것만을 지향하면 외로워진다. 돈 된다고 다 허물면 쓸쓸해진다. 온통 새것뿐인 아파트와 가게와 옷과 차는 예쁘지만 거기엔 내가 없다. 내 흔적이 별로 없는 곳엔 내가 없는 것 같다. 좋은 곳, 좋은 길, 좋은 것에 손자국 발자국을 새겨두고 싶다. 내 행복의 리스트에 오래된 것들을 가만히 추가한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은 '기억 체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 주변에서 결국 우리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변하지 않는 '거리, 랜드마크, 저수지 같은 자연물'이다. 약속을 잡을 때 새로 지어진 빌딩이 아니라 지금도 있고, 그 전에도 있어서 누구나 알만한 곳으로 이야기한다. 이번 약속뿐만 아니라 다음, 그다음, 그다음에도 여전히 그곳이 기준이 된다.
비단 약속뿐일까. 각자에게 소중한 것도 언제나 있을 것 같은 길이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기억하라는 말이 좋았다. 소중한 것을 기억하려면 변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고, 몸은 항상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 새 것의 외형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 잡지만 오래 못 간다. 그곳에는 흔적이 없고, 추억이 없고, 역사가 없다. 오래가는 것들은 내가 만든 흔적이 있고, 기분 좋은 추억이 있고, 함께 한 역사가 담겨있다. 그것들이 비로소 행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좋은 경험만이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실패로 점철된 인생사문턱을 넘으면서 생긴 사연들이 교훈이 되고 추억이 되기도 한다. 오래 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전에 허물어지면 교훈이고, 추억이고 남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공간에 머문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여기에는 공통된 감각이 있다. 바로 생각이 사라지고 몸-마음이 하나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행복감과 닿아 있다.
― 책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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