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위에 무언가 툭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잠에서 깼다. 전날 밤 미루고 미루다 잠이 든 탓에 아침이 되면 잠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일까. 출근길 지하철에 자리가 생기면 부족했던 잠을 채우기 바빴다. 책 <일의 기쁨과 슬픔>에 수록된 단편 소설 <탐페레 공항>의 시작도 매일 아침 우리가 졸음을 참지 못하는 지하철에서 시작된다.
소설 속 주인공인 그녀를 잠에서 깨운 건 아침부터 부지런히 지하철에서 껌을 파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졸고 있는 승객의 무릎이나 껌을 놓기 좋은 가방 위에 차례대로 놓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껌을 지그시 쳐다봤다. 껌에는 '핀란드산 자알리톨'이라 적혀있었는데 그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핀란드라는 나라를 생각했다.
아니다. 그녀는 가봤다. 잠깐이었지만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3개월짜리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길에 핀란드를 경유했다.
핀란드의 작은 도시 탐페레에서 경유를 하는 동안 시력을 거의 잃은 핀란드 노인을 우연히 만났다. 시간도 때울 겸 공항 주변에서 노인과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을 하면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노인의 물음에 그녀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방금 만난 사람이 오래 본 사람보다 편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젊은 시절 사진기자였다고 했던 노인은 시력을 거의 잃은 이후로는 직접 인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노인은 짧은 만남이 아쉬운 탓에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주었고, 종이에 주소를 적어주면 나중에 사진을 인화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일랜드에서의 3개월이 쏜살같이 지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핀란드 노인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여행에서 복귀한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정신없었다. 노인이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빨리 답장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마음은 순간이 지나면 일상적인 일에 금방 밀리고야 만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이런저런 잡다한 학사일정을 챙기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노인에게 답장을 해야겠다는 사실은 점점 기억 속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길을 걷다가 걸음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만나거나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보는 순간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언젠가 해야하는 일 하나를 영영 미룬 것처럼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몇 년이 지나고 그녀는 식품기업 회계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다큐멘터리 PD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 수술비도 지원받았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출근길 무릎 위에 놓인 껌이 몇 년 전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불러온 것처럼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단조로운 일상에 한 번씩 방문할 때 현재 이 순간에 적당히 만족하는 모습은 못나보기 마련이었다.
나를 더 힘들 게 만드는 건 하고 있는 일이 초라하게 여겨질 때였다.
꿈이라는 건 언제나 꾸기 좋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별 볼일 없는 지금과 비교되기도 쉬워서 현재 서있는 자리를 작아보이게 만드는 습성이 있다. ‘꿈’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감정 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꺼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 위에서 천천히 유영하던 내가 깊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노인에게 답장을 보내는 일도 비슷했다.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겠다는 우리의 게으른 마음처럼, 사실 시간은 지금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미루는 게 편했다. 그래서 언젠가 될지도 모르는 나중을 기약하고야 마는 나쁜 습관처럼 그녀 또한 편지를 받고 바로 보냈으면 될 일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보니 한 번씩 일상 위로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가운데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사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까닭은 결국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직 하지 못한 일에는 쓸데없이 많은 상상이 덧붙여지는 법이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그 노인이 연락을 미룬 사이에 눈을 감기라도 한다면 그건 답장을 하지 않았던 내 탓이 아닐까.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은 평소에 별 일 아닌 것들도 무겁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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