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Crema)를 쓴다는 것.
재미없을 땐 다른 책을 볼 수 있는 매력, 크레마 사운드
2017년 2월 15일, 회사 복지포인트로 어떤 '쓸모 있는 것'을 살까 하다가 지금의 크레마 사운드가 내게 왔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책은 당연히 손으로 넘겨보는 맛이지'하던 나였다. 맞다. 여전히 책은 손으로 넘겨보는 맛이다.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그건 자리 잡고 읽을 때나 유효한 것이었다. 사실 책은 읽을 준비가 된 상황보다 그렇지 않은 상황들이 더 많다. (책을 즐겨 읽지 않았을 땐, 읽을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만으로 독서를 얼마나 미루고 미루었던가. 보통 어떤 일을 할 때는 딱히 이유가 없지만, 하지 않을 때는 무수히 많은 핑계들이 존재했다)
책을 읽을 땐 보통 회사 또는 카페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읽기도 했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도 읽는 양이 제법 됐다. 이것뿐이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지하철 승강장은 최고의 독서 장소가 되기도 했다. 혹자는 그런 자투리 시간이 책 읽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라며 의심을 품지만 그 시간이 겹겹이 쌓여 어느덧 연간 독서량의 20% 이상을 차지하니 절대 무시하지 못할 수치다.
우주를 잃어버리지 말 것, 책 <1cm+>중에서
다시 크레마로 돌아와서,
크레마가 내 삶에 들어온 이후 초기 몇 달간은 종이 책을 통한 독서량이 급격히 줄었다. 1년에 50권 정도 읽는다고 치면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종이책은 10권 정도 읽고 나머지 40권은 전자책으로 채워졌으리라. 하지만 몇 개월 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종이책의 독서량이 전자책을 구입하기 전만큼은 아니더라도 70~80% 수준으로 돌아왔고, 전자책은 그 이상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내 독서 페이스를 보면 많이 읽어야 50권이었는데 올해의 2/3가 지난 8월에 벌써 4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독서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캐나다의 비즈니스 및 문화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데이비드 색스가 쓴 책 <아날로그의 반격>에서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 MP3, 스마트 폰이 생긴 이후 망한 줄 알았던 레코드 판의 반격.
-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망한 줄 알았던 폴라로이드의 반격.
- 인터넷 서점의 출현으로 거의 사라진 줄 알았던 오프라인 서점의 두드러진 증가세
- 실리콘 밸리에서 유행하는 몰스킨의 위력.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자책의 출현으로 판매량이 급격히 줄었던 종이 책의 증가세까지.
위 책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디지털은 초기에 아날로그의 '대체재'처럼 보였지만(그래서 아날로그 대부분의 점유율을 빼앗아갔다.) 어느 순간 '보완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이때 다시 아날로그의 점유율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위 책에서 언급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벅스와 멜론과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애착이 가는 음악은 LP판에 담긴 음악일 가능성이 높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이라는 말은 곧 디지털이 추구하는 편리함을 설명하는 단어들이다. 빠름을 강조하는 요즘 시대에 편리함은 우리의 니즈를 바로 충족시켜주긴 하지만 만족감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접한 음악과 기타 서비스들은 그 시간에 잠깐 소비한다는 느낌이었지, 듣거나 보는 것이 주는 만족감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책은 어땠을까.
과거 종이책만 있었을 땐 책을 동시에 읽고 싶어도 무게의 제약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어떤 한 시점에서 책 A를 읽든, 책 B를 읽어야겠다. (만약 둘 다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으면 무거움이라는 아주 큰 리스크를 감수했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은 무척 따분한 존재였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고 한들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할 수는 없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출간 기념 북 토크 현장에서 "책을 숭배하지 말아요"라는 말을 했다. (관련 기사)
책을 많이 사고 읽은 많은 독서 실패도 많이 했죠. 기본적으로 저는 독서에 성공이나 실패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대부분 책을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실패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책을 50쪽만 읽었다고 해서 독서에 실패한 건 아닌 것 같아요. 50쪽만큼 성공한 거죠.
이동진 씨가 말했듯,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재미가 없거나 흥미가 떨어지면 다른 책으로 옮겨서 읽고, 다시 흥미가 생기면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된다. 그 책은 나에게 딱 그만큼의 역할인 거다. 하지만 우리는 꼭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어서 재미보다는 다 읽었다는 가짜 '성취감'을 우선시한다. 또한 다른 대안을 바로 선택할 수 없다는 종이 책의 한계도 강박관념을 한 스푼 보태준다.
재미없을 땐 다른 책을 볼 수 있는 매력, 크레마 사운드
여기서 크레마의 매력이 철철 나온다. 지금 보는 책이 재미없으면 다른 책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 종이책처럼 무게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뒤로 가기를 누르고 다른 책 '열기'를 누르면 된다. 책은 지식을 채우기에 앞서 재미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독서 철칙 중 하나다. 재미가 없는데, 지식만 채우면 그 지식이 온전히 내 것일까? 그냥 빈 껍데기에 불과한 보여주기 식 지식이 아닐까.
가방에는 늘 크레마 사운드와 종이 책 1권이 같이 들어있다. 동적인 장소(버스, 지하철 등)에서는 주로 크레마를 통해 읽고, 정적이면서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장소(약속을 기다리거나, 회사 또는 집에 있을 때)에서는 종이 책을 펼쳐 읽는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전자책이 주는 가벼움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반년 정도 사용해본 결과,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다.
크레마를 구입했을 당시에는 주변에 전자책 리더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현재는 나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 모임 사람들, 친구들까지 전자책 리더기를 속속 구입하고 있다. (그들 또한 나만큼이나 손으로 넘겨보는 책을 좋아했던 종이책 예찬론자들이었다. 지금 전자책을 읽는 그들은 오히려 나보다 만족감이 더 높다) 전자책을 읽는다고 해서, 종이 책을 안 읽는 것도 아니고 종이 책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을 적절히 보완해서 책을 읽으니 내 삶에 독서가 더 깊숙이 들어오게 됐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절대 서로 대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각자만의 매력이 있고, 고유 영역이 있다.
크레마를 쓴다는 것, 어쩌면 내 독서 인생에 더 많은 재미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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