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를 보게 된 방법은 총 세 가지로 나뉜다. 그냥 보게 되는 영화, 어쩔 수 없이 보는 영화 그리고 찾아보게 되는 영화. 그냥 보게 되는 영화는 말그대로 그냥 보는 경우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영화를 택하거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틀어놓는 경우다. 보통 이런 영화류는 웃고 우는 감정만 순간 소비할 뿐 딱히 기억 속에 남는 건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보는 영화, 누군가와 같이 영화를 보거나 또는 헬스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그냥 틀어져 있는 경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경우다. 간혹 수작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냥 보게되는 영화처럼 흘러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마지막 찾아보게 되는 영화, 바로 인터스텔라나 또는 족구왕 같은 영화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나 작품의 퀄리티 등으로 인하여 이런 영화류는 끌리기 마련이다. 보통 이런 영화는 직접 찾아보고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찾아보라고 전달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관객들이 만족도가 높다.
독립영화는 특별히 그 분야에 관심있는 관객들이 아니고서야 접하기가 쉽지않다. 대기업급 배급사들이 잠식한 영화 시장에서 주로 소규모 배급사가 담당하는 독립영화는 '워낭소리', '님아, 그강을 건너지마오'처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지 않는 이상 조용히 묻혀버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도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꽤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대기업 배급사에 밀려 영화 시장에서 조용히 밀려나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다. 좋은 작품일수록 점차 스크린을 늘려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배급사의 목적이거늘 천민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꿈꿀 수도 없는 일이다.
족구왕은 누적 관객수 45,699명으로 스크린에서 물러났다. 독립영화로써는 훌륭한 수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쉽다. 배급사만 조금 더 늘렸다면 충분히 수십만명이 보고도 남을 작품이였는데 말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홍만섭역을 연기한 배우 안재홍씨와 그가 짝사랑하는 그녀, 서안나 역할을 맡은 황승언양의 비주얼과 역할이 상당히 컸다. 정말 갓 전역한 복학생 같은 비주얼의 안재홍씨는 흡사 우리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싱크로율이 훌륭하다.
(이 밑으로 족구왕에 대한 스포가 가득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족구왕은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캐릭터들도 역할이 상당하다. 그 중에 가장 현실감 있는 캐릭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형국(박호산)'이라는 캐릭터였다. 대학 생활에서 술 먹고 연애하는 건 다 사치다. 그냥 학과에서 쥐죽은 듯이 학점 관리하고 토익 공부하면서 공무원 시험 보는게 최고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공부하라고 조언하는 모습이 어쩜 나한테 하는 거 같은지, 이미 그의 뒤에 앉은 후배들도 그를 따라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인물이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고운(류혜린)'역을 맡은 분의 캐릭터를 알겠더라.
그리고 홍만섭이 짝사랑하는 그녀, 서안나(황승언). 강의 시간에 지각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에 선글라스에 힐까지 신고 왔다. 요즘 여대생들을 정말 잘 표현해냈다.
그리고 또 다른 주연, 전직 축구선수였던 '강민(정우식)'이다. 안나의 썸남으로 출연한다.
이런 장면들을 보니 주성치의 B급 코미디극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코미디가 가능한 인물이 있었다니. 정말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다.
식품영양학과 족구팀의 일원, 미래(황미영)라는 역할은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어다준다. 큰 표정변화 없이도 담담하게 뱉어내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색하지도 않고 역할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족구 연습을 위해 공 대신 우유곽으로 연습을 하면서 그녀는 매번 우유곽을 뭉개뜨리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 코믹 포인트.
특히 그런 미래를 보고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족구 노하우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연기가 맛깔스럽다.
'누나,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요~'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다녀왔는데, 학자금 대출의 이자는 쌓여있다. 다음 학기 등록을 하려면 이자금을 갚으라는 재단. 만섭은 학기를 등록하기 위해 교외 근로며, 고깃집에서 알바생으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만섭을 보고 보너스를 주는 고깃집 사장님, 이런 사장님이 몇이나 될까.
전에 첫 만남에서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는 만섭에게 안나는 미래에 자기는 뭐하고 있냐고 물어본다.
그런 안나에게 만섭은 안나씨는 '저 닮은 딸 한 명과 안나씨 닮은...'
여기서 안나의 영어 욕 시전, 그리고 뜬금없이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길 때마다 싸다구 작렬.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며 자리를 떠나버리는 안나, 좋아하지 말라고 좋아하지 않으면 그게 사랑일까.
족구대회에서 옥상에 올라가 해설을 맡은 (비주얼은 대학생이 아니지만)대학생 두 명, 어쩌면 그냥 CG와 BGM으로 조용히 끝나버릴 족구 경기에 대해서 긴장감과 묘한 재미를 가져다 준다. 해설 참 맛깔나게 하는 듯.
강-약-강-약
영화 속에서 짧은 대사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장면.
공무원을 준비하는 형국은 만섭에게 너에겐 족구가 뭐냐? 라고 묻는데 만섭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재밌잖아요.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만섭이 알바하는 고기집으로 회식 온 만섭의 족구팀. 거기서 사장님은 조용히 안나를 부른다. 이미 만섭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장님은 안나에게 만섭이가 참 누구 주긴 아깝고, 내가 갖긴 좀 그렇지? 그냥 너 끌리는 대로 해.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가는 장면, 미래는 창호를 업고 떠났고 안나와 만섭은 단 둘이 걸어간다. 여기서 안나는 가위바위보 게임을 한 번 더 하자고 제안하지만 만섭은 그 전 일을 생각하며 거절한다. (사실 이 장면에서 다시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면 어땠을까. 전처럼 싸다구 시전은 아닐 것 같고, 많은 생각을 가져다 주는 장면이었다.)
영어 수업 시간, 안나의 파트너는 만섭이지만 대출금을 납부하지 못해 결국 학기 등록을 놓쳤다. 만섭은 강사에게 발표할 기회는 한 번 주라며 간곡히 부탁한다. 하는 수 없이 강사는 허락하고 안나와 만섭의 연극이 시작된다.
준비한대로 극 발표를 시작하려는 안나.
하지만 만섭은 준비한대로 대사를 하지않고 안나에게 고백을 시작한다. (여기가 족구왕의 최고 명장면이 아닐까.)
영어는 무척 서툴지만, 그에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
You will not believe me, but I came from fifty years later in the future 2063.
당신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인 2063년에서 왔습니다.
I was in the hospital, I was just about to die from rectal cancer.
그때 저는 직장암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I was in big pain, I want to die.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고만 싶었습니다.
At that moment an angel came to me.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천사가 제게 대가왔습니다.
She said your life us the most boring life in the universe
그녀는 제가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면서
So you wouldn't have fun even in heaven.
천국에 가서도 즐기지 못할 거라 말했어요.
She said she send me back to 2013.
그리고는 저를 2013년으로 돌려 보내 주었습니다.
When I was 24.
스물 네 살로 말이죠
shit! I have to go to army once again.
아씨... 저는 군대를 다시 가야했습니다.
but, I'm so happy to go back to my 20s.
그래도 이십 대로 돌아오니 좋아했습니다.
because when I was 24 I didn't even have time to date
왜냐하면, 전 그때 연애 한번 못 해보고
I just prepare for the recruitment of the several servant every day and night.
밤낮없이 맨날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파묻혀 살았거든요.
I had so many things to do if I could go back to 2013.
2013년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I wanted play 족구 every day.
먼저, 족구를 매일매일 하고 싶었습니다.
What are saying going to do just then something cross my mind.
또 뭘 할까 생각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There was a girl. The most beautiful girl, I have ever seen.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살면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she like on angel
그녀는 마치 천사 같았어요.
but I was so chicken
그런데 저는 겁쟁이처럼
I didn't say anything I just looking at her distance.
그녀에게 고백 한번 못해보고 멀리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습니다.
I was so stupid.
정말 병신 같았습니다.
but I had another chance now.
하지만 이제 제게 드디어 기회가 생겼습니다.
I won't be a ----- this time
이번엔 꼭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I love you.
사랑해요.
I love you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만섭의 고백 섞인 영어대사가 끝나고 안나는 thank you로 마무리한다.
드디어 대망의 족구 결승전 민이가 속한 토목과 대 만섭이 속한 식품영양학과의 경기. 안나는 고백을 받은 후 경기를 보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이 장면이 안나가 가장 예쁜 장면으로 손꼽고 싶다.
경기는 족구왕 만섭의 독수리 슛으로 식품영양학과의 우승으로 끝났지만 만섭, 개인의 입장에서 결말은 씁쓸하다.
안나는 만섭이 아닌 민이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를 얻지 못했지만 만섭은 민이와의 족구대결로 벤츠를 얻었다. (지극히 비현실적 ㅋㅋㅋㅋㅋㅋ)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 만섭, 정말 미래로 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만섭의 농담이었는지에 대한 엔딩은 관객들의 상상에..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주제를 스크린 속으로 잘 표현해냈다. 남자라면 한번쯤 군대에서 해봤을 법한 족구게임, 그리고 군대를 갓 전역하고 복학을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캠퍼스 상황들.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은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안재홍씨와 황승언씨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듯 싶다.
마지막에 안나가 만약 만섭의 고백을 받고 그에게로 갔더라면 관객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상황을 스크린 속에서 대리만족했겠지만 결국 그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스크린에서 현실로 데려다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별 거 아닌 대사들 중에 명대사들이 유독 많았다. 그냥 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깊이 있고 여운이 있었다.
무엇보다 민이를 찾아간 안나가 그에게 내던진 대사 한 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쫌 쪽팔리면 어떠냐! 만섭이봐 존나 병신같아도 지 하고싶은거 다 하면서 살잖아!
평점 8 / 10
그리고 영화와는 별도로 안재홍씨와 황승언씨는 파스텔 뮤직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발매한 사랑의 단상 chapter.5에서 M/V로 같이 출연했다. 족구왕 영화 속의 감정이 고스란히 M/V로 옮겨지는 거 같아서 꽤 여러번 봤다. 특히 안재홍씨는 연기를 어쩜 이리 잘하는지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도 한 번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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